보통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던 여섯 살 전후였던 것 같다. 어머님은 내게 한문을 배우게 하셨는데 그 방법이 아주 독특했다. 어머님은 아침밥을 먹기 전에 반드시 붓글씨를 쓰게 하신 것이다. 당시로서는 먹이나 붓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종이가 가장 문제였다. 한지(漢紙)는 값이 매우 비싼 귀중품이었으며 문종이를 하기에도 모자랐던 것이다. 그래서 대개 방문이 숭숭 뚫린 채 지내는 일이 많았고,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있는 집은 창문이 성할 날이 별로 없었다. 어머님은 귀한 종이를 주로 선교사들을 통해 입수하였다. 종이라고 해도 신문지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섬에서는 거의 유일한 종이었다. 그 매끄러운 신문지를 쭉 펴놓고 밥상이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한문을 써나갔다. 잘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격식을 갖추고 배운 덕택에 지금도 글씨 못쓴다는 얘기는 듣지 않고 산다. 그것이 어려서 어머님의 지독한 하드 트레이닝 덕택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머님의 자녀 교육열이 아침밥을 굶겨서라도 글씨를 쓰게 한데서 그 준엄한 일면을 보게 되는데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큰 누님(朴敬信 권사)을 가르치기는 해야겠는데 여자이기 때문에 서당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섬 지방에는 보통학교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개는 서당에 가서 훈장에게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것이 기초공부였다. 아버님과 의논한 끝에 어머님은 누님을 남장(男裝)시켜서 서당에 보내기로 하였다. 흑산도로 옮겨간 때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어서 이 기발한 남장 입학은 성공했고, 누님은 얼마 동안 남자아이들 틈에 섞여서 한학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그 후 누님은 결국 신학문에 눈을 떠 목포의 정명(貞明)여학교에 들어갔고, 서울에까지 유학을 다녔었다. 어머님을 생각할 때마다 서예의 대가인 한석봉 선생의 어머니를 연상한다. 우리 형제들에게 학문에 관한 한 타협을 모르는 외곬의 성품이었다. 배우지 못하면 낙오되고 폐인이 된다면서 무섭게 공부를 시켰던 어머님이었다. 40이 넘어 얻은 아들을 공부시키고자 보통학교가 있는 육지로 떠나 보낼 정도로 지독한 일면이 있었다. 섬에는 신학문을 공부시킬 보통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해남으로 보내 친척집에서 보통학교에 다니게 했었다. 나는 어린 몸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해남군 계곡면의 성진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 박요한(한국섬선교회 ▼) * 사진은 허육도(충남 보령)에서 전도하던 중 예배드리는 장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