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째 섬목회, 흑일도 정광섭 목사
한국교회 신앙의 향기를 찾아(8)
22년째 무교회 섬을 돌며 복음을 전해온 흑일도 정광섭 목사를 찾아 나선 길. "땅 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저녁/ 파도 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해남 땅끝마을 시비(詩碑)가 반긴다. "서울서 온 김 기자요?" 토말 선착장까지 마중 나온 정 목사 부부가 한국섬선교회 복음선 방주 11호 위에서 손을 흔든다.
#강원도 두메산골서 섬마을로
"통통통" 똑딱선이리란 예상을 깨고 배는 부드러운 스크루 소리를 뒤로하며 미끄러지듯 포구를 빠져나간다. "이래 보여도 25노트(시속 50㎞) 쾌속선입니다. 작년 11월 어느 작은 교회 목사님이 '이름 알려지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며 16년 된 배를 교체해주셨어요. 예전 것은 워낙 작아 샛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고 너울이 져도 성도들이 기다리는 지척의 섬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지요."
강원도 화천이 고향인 정 목사가 남도 끝자락 전남 완도군 흑일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주님의 예비하심이었다. 30대 초반에 흑일도에 전도하러 들렀다가 몇 년 후 다시 와 보니 교회는 세워져 있었으나 목회자가 없더란다. "예전에 예수 믿으라 해놓고 저리 교회를 비워두면 어쩌냐"는 섬마을 이장의 핀잔에 물 좋은 육지 교회를 놔두고 섬에 뿌리박았다. 올해로 22년째. 이젠 토박이보다 전도 구역인 4개 섬 서화도 동화도 마삭도 어룡도 사정에 더 밝다.
#마삭도 할머니가 있는 항해일지
올망졸망 섬 사이를 20분쯤 달려 큰바다로 나가자 파도가 뱃머리를 쑥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으며 물벼락을 선사한다. 부선장이자 갑판장인 최경숙 사모가 환하게 웃으며 첫 번째 방문지 서화도를 가리킨다.
"멀리서도 왔네요 잉." 5년 전 홀로 된 85세 허금단 할머니가 쪽머리를 매만지며 반갑게 맞이한다. 해질 녘이면 서쪽에 핀 꽃같다는 서화도엔 세 가구가 산다. 그마저 요즘엔 김발 작업 때문에 모두 나가 살고 할머니 혼자 섬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 한 분만 계시지만 1주일에 한번은 꼭 찾아갑니다. 날씨라도 안 좋아 예배를 거르면 무척 섭섭해하세요." "그럼, 목사님이 자식보다 낫제." 봄날 오후, 할머니 건강을 기원하는 기도와 찬송 소리에 흑염소 눈이 또렷해진다.
여덟 가구가 사는 마삭도에는 예배 처소가 있다. 22년 정 목사 섬목회의 작은 결실이다. 마삭도 할머니들이 극성스레 반긴다. “와 이제 왔소? 일찍 오제.” 정 목사가 오는 날이 예배날이다. 예배처소에 다섯 성도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덕심(92) 김행례(81) 이옥자(63) 박성애(75) 할머니와 김상윤(75) 할아버지다. 모두 건강하시다. 믿음의 성도들인 탓일까?
세 번째 방문지 어룡도 가는 바닷길에서 방주호가 반가운 동역자를 만났다. '복음Ⅱ호'로 인근 노화·소안도 목사님들이 연합해 운행하는 선교선이다. 봄바다 위의 아름다운 만남, 그리고 이별이다.
#주님을 위해 내놓은 세 자식
방주11호 모항인 흑일도. 뉘엿거리던 해가 땅끝 전망대와 서화도 사이로 뚝 떨어지자 어둠이 밀려온다. 손님을 맞는 사모의 손길이 분주하다. 10평이 채 안 되는 흑일교회 예배당에는 귀한 성도 7명의 이름표가 붙어있는 개인용 작은 밥상이 놓여 있다.
교회 옆 가건물로 붙인 살림집에서 받은 저녁상에서 분주했던 사모의 발걸음이 짐작된다. 금세 뜯어온 취와 머위잎 무침, 이웃에서 얻어온 전어보다는 작고 밴댕이 만한 '대미'라는 생선 소금구이가 전부다. "두부 한 모 사려면 땅끝까지 나가야 하는데 배를 움직이면 400원짜리가 4000원이 돼버려요. 살림살이도 그렇고…."
가족사진 속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냐고 묻자 고개를 떨군다. "큰딸 사라, 둘째딸 은혜, 막내아들 직, 세 아이 모두 초등학교 5학년 이후 뭍으로 떠나 남의 집과 기도원을 전전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죠. 10년 전쯤 담임선생님이 불러 상경했더니 아이들을 위해 섬에서 당장 나오라고 하더군요. 한참 눈물을 흘리다가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는 말에 어이없어하던 선생님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아이들이 이젠 올곧게 자라 두 딸은 신학대, 막내는 누나들의 학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자원 입대해 군복무 중이다. 세상에 이리 무심한 주님의 종이 따로 있을까?
#끝인가 하면 다시 시작되는 바닷길
새벽기도 소리에 잠을 깼다. 목사님과 사모, 성도 한 분이 전부다. "이 세상 풍파 심하고…" 세 분의 찬송이 파도소리를 뚫고 해보다 먼저 새벽을 깨운다.
92세 허선심 할머니를 찾아 떠난 동화도 길. 수백 년 된 동백나무와 팽나무, 후박나무가 섬을 에워싸 동리 입구만 겨우 보인다. 집이 비어 있다. "어머, 할머니 밭일 하시네." 파밭에서 할머니를 찾았다. 이젠 한 분만 남았다고 한다. "마지막일 것 같던 성도가 돌아가시면 이젠 끝인가 싶은데 신기하게 또 믿는 분이 나타나요. 그래서 22년째 무교회 섬 사역을 끊을 수 없었죠. 하나님의 뜻인가 봐요."
완도=김연균 기자 ykkim@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