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의 시련은 쉽게 끝나지 않고 2년째 접어들었다. 30대 중반을 넘기는 노총각이다 보니 한해 한해가 초조하여 1년이 10년 같다. 겨울만 되면 하늬바람은 거침없이 불어와 사람들을 방안에 가두어 버린다. 긴긴 겨울, 노총각 홀로 사는 삶이란 옆구리가 시린 정도가 아니다, 은장도가 있다면 허벅지를 긁어야 할 외로움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소리를 들으며 한 자루의 초가 다 타도록 불꽃만을 응시하며 말없이 한 밤을 새웠다. 일종의 묵비권 시위 기도였다. 한 밤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다. 구들방이 식어 군불을 지펴 놓고 따뜻해지길 기다린다. 먼동이 틀 무렵 ‘구체적인 기도를 해 보렴’ 이런 영감이 스쳤다. 다시 교회로 가서 기도했다. 첫 번째, 키는 5센티 정도 커야 해요. 2세를 위해 배우자 키가 커야 하지만 5센티 정도 더 큰 사람을 원했다. 15번째 맞선 본 사람은 10센티 이상 큰 사람이라 함께 걸어가면 그림이 좋지 않았고, 키 차이가 너무 많아 키 작은 내가 자존심이 상했다. 두 번째, 사명감이다. 목사가 멋져 보여 즉흥적인 결정은 위험하다. 사모를 위해 어릴 때부터 기도로 준비한 사람이여야 한다. 사명감 없이는 낙도에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학력이다. 학력은 대졸로 해주세요. 낙도 일수록 팔방미인 격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학력도 무시 할 수 없다. 그래서 대졸 정도의 학력이면 좋겠다고 했다. 네 번째, 미모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던가?……. 좋은 것만 골라 요구하는 입장에서 이왕이면 미모도 뛰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를 하고 보니 배우자 기준을 오직 15번째 사람과 비교한 것 같다. 아마도 오기가 발동한 것 같다. 기도대로 된다는 확률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안이 따뜻해지길 기다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데 “수리교회 전도사님은 전화 받으시오” 마을 방송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첫 방송은 나를 찾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누가 나를 찾을까? 자석식 전화가 있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전화 교환원이 건네준 수화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젊은 여자 목소리이다. "저, 여기 동두천인데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여자목소리는 전혀 모른 사람이지만 단숨에 자기소개를 하고 친구 소개를 하는데 일종의 전화 중매를 하고 있다, 오늘 새벽녘에 기도로 요청한 바로 그 사람이다. 신기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몇 마디 더 질문하고 있는데 육지로 전화 걸려고 줄서고 있는 뒷 분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를 짧게 끝내라는 성화다. "네, 제가 다음 주 수요일 날 의정부로 가겠습니다." 나는 3통화(9분)를 했다. 육지와 통신 교환은 아침 7시, 10시, 오후2시, 5시, 하루 4차례이다. 1회에 1시간, 그 안에 육지에서 오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육지로 걸기도 한다. 1986년 3월 첫 주에 신학교 새 학기 개강에 맞춰 학교 등록을 하고 의정부 맞선 장소를 찾아 갔다. 도착하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 중에 맨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눈 큰 아가씨가 눈에 확 들어 왔다. 단번에 ‘저 사람 이구나’ 짐작 할 수 있었다. 소개 받은 우리는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동안 서로 오래 사귄 사람처럼 이야기가 잘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다음 주, 수요일에 또 찾아갔다. 결혼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끝에서 끝이라 자주 올라 올 수도 없고 중대한 결혼 문제이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절차를 밟기 위해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지만 반대하신 부모님은 아예 집으로 맞아들이시지 않았다. 순순히 들어오라고 하실 것 같지가 않아 거실로 갔다. 거실입구에서 장승처럼 서 있었다. 한참 후, 인사만 받고 내 쫓을 양으로 마지못해 나오셨다. "우리 애와 알고 지낸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네. 6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 집까지 왔지요." "네. 제가 올해로 37세입니다. 그동안 맞선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만 그중에서 김 선생이 가장 제 마음을 편하게 해줘서 인연으로 생각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려고 왔습니다." "알았으니 저쪽 방에 가서 자고 내일 내려가요." 단 두 마디 말씀만 하시고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예측대로였다. 저쪽 방은 아들 방이다. 아들을 친구 집에 가서 자도록 하고 나를 아들 방에서 자도록 하신 것은 배려일까 최소한의 인사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잠을 설쳤다. 다음 주, 수요일 또 찾아 갔다. 저녁 식사를 차려주신 상이 꽤나 거나했다. 식사를 하는 상 앞에 예비 장모님이 앉으시며 먼저 말문을 여신다. "학교 다니는 학생이 매주 올라오면 공부는 언제 해요, 다음부터는 올라오지 말아요." "......?" 왜 올라오지 말아야 하는지?, 또 퇴짜 인지?, 영문을 몰라 멍하니 눈만 멀뚱멀뚱하며 예비 장모님 얼굴만 빤히 바라보는데, 눈만 둥그레 하는 뜻을 아셨는지 “내려가 있으면 결혼 날짜 잡아서 전해 줄 테니 그리 알고 내려가요.” 내 걱정과는 달리 너무도 반가운 말씀이다. 단 몇 초 사이에 지옥과 천당을 왕래 했다. 1986년 3월 초에 맞선 본 후, 약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장은 의정부중앙감리교회이며 신혼집은 지금의 흑산면 대둔도이다. 혼수품을 미리서 신혼집에 가져다 놓기 위해 중매한 친구와 둘이서 신혼집을 둘러보러 온다고 편지가 왔다. 말은 신혼집을 둘러보기 위해 온다지만 실상은 37세 총각이 맞는지? 나의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오는 것이다. 중매 장이로 부터 어느 정도는 들었지만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걱정이다. 신혼집 둘러보러 와서 질겁하고 결혼 퇴짜를 놓치는 않을까?, 말이 신혼집이지 ‘춘향이 집’ 같이 얼기 설기로 쌓은 벽돌불럭에 미장 안 된 무허가 건물은 창고나 다름이 없다. 방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는 재래식 온돌방이다. 약혼녀가 왔다. 함께 온 중매한 친구는 곧장 교회로 가서 기도하다 대성통곡을 한다. 중매는 했지만 이렇게 허름한 집 인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지 중매한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스러울 정도 이다 보니 중매 선 것을 후회도하고, 사랑하는 친구가 이런 한심한 곳에서 살 것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여 만감이 교차해 교회가 떠나갈 듯 통곡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결혼 당사자인 그는 도착하자마자 옆집 집사님에게 몸빼 바지를 빌려다 갈아입고 부엌으로 가더니 석유곤로에 불을 붙이고 몇 가지 사온 반찬거리로 점심 준비를 한다. 마치 결혼한 새댁처럼……. 정작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고 자연스럽다. 내 사람이 되려고 그런지 어색한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궁전 같은 친정집과 비교 할만도 한데 불편해 하지 않는 것 보니 파혼은 않을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15번째 맞선 본 아가씨는 섬에서 낳고 자란 본토인이지만 섬에서 못살겠다고 결혼 한 달 남겨 놓고 파혼의 쓰라림을 안겨주었는데 육지에서도 멀고도 먼 의정부시내에서 살던 아가씨가 정말 시집올까? 결혼은 한다지만 어느 것 하나 내 세울 것 없는 처지라서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결혼식 때 까지는 내가 사는 모습을 안보여주고 싶었는데, 보여주지 않아야할 것 까지 다 보게 되어 불안하였다. 한편, 정말 인연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5월 24일 결혼식을 마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비행기가 점점이 떠있는 뭉게구름 위로 날아가는 신기한 광경을 보면서 신혼여행에 들떠 있는 내가 마치 구름을 타고 둥둥 떠가는 것만 같았다. 신부가 비행기 트랩을 내릴 때 한복치마가 길어 넘어질 것 같아 신부 손을 처음으로 잡아 주었다. 짜릿한 기분으로 내렸다. 제주에서 신혼여행은 가는 곳곳마다 향수를 하늘에서 흩뿌려 준 것처럼 밀감 꽃향기가 그윽하여 신혼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하였다. 3박4일 달콤한 신혼여행을 마치고, 서울노량진에 있는 시댁 본가를 들려 부모님과 형님 누님 일가친척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의정부 처가댁에서 하루를 보낸 뒤 흑산도 신혼집으로 왔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으로 열흘 정도 비워둔 집 화단에는 잡초가 훌쩍 자라버린 그 속에 해당화가 활짝 피었고 장독대에 노란 가루먼지들은 중국에서 날아 온 황사 인줄 알았는데 송화 가루가 날려 있었다. 도착한 신부는 가방에서 몸빼 바지를 꺼내 입었다. 백화점 유명상표나 논노패션 옷들은 친척 동생들에게 몽땅 줘 버리고 월남치마 같은 옷을 즐겨 입는다. 주민들에게 위화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좋은 옷들은 하나도 가져 오지 않았다. 나는 이 섬에 온지 5년 만에야 노총각 신세를 면하고 처음으로 신부 손에 밥을 먹게 되었다. 부엌에서 나오는 구수한 냄새들은 사뭇 기대가 컸다. 밥상이 들어왔다. 밥상에 커다란 프라이팬 위에는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화들짝 놀라 자세히 보니 장어였다. 생선을 다듬을 줄도 모르고 요리 할 줄도 몰라 이웃집에서 가져다 준 것을 통째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워 그대로 가져왔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뱀이 또아리 틀고 있는 것 같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아내는 시집오기 전까지 친정어머니가 손수건까지 빨아주어 살림이 뭔지도 모르고 시집을 왔다. 동두천 단위농협은행에서 근무한 10년 직장생활은 연봉도 꽤나 받는 중견이다. 연봉은 연봉대로 보너스는 보너스대로 받을 만큼 받기 때문에 그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녀는 남의 돈도 실컷 만져보고, 자기 돈도 써볼 만큼 써보았고, 돈 냄새는 실컷 맡아 봤지만 돈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허무한 생각만 들어 진정한 행복을 찾아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잘나가는 직장을 하루아침에 때려치우고 흑산도에서도 더 떨어진 작은 섬(대둔도), 지도에도 없는 섬으로 시집간다고 하니 친구들과 직장 상사들도 말리고 친정어머니는 절대 반대하셨지만 장인의 강권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만남이 있지만 이런 만남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 정삼섭(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