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읍교회로 옮겨 전도사로 일했으나 아주 잠깐 동안이었기 때문에 장흥 시절에 대한 추억은 기록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앞서 담양읍교회의 부흥회를 언급했는데 그 때 강사로 초빙된 김형모(金炯模) 목사님이 시무 하던 보성군 벌교(筏橋)의 벌교읍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해 달라는 청빙을 받았다. 김 목사님을 내심 흠모하던 나는 이 청빙을 기꺼이 받아들여 벌교읍 교회로 가게 되었다. 벌교는 조그만 소읍이었으나 물산이 풍부하고, 또한 해산물 집산지로서 남해안의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부임한지 보름 되던 날이었다. 순천노회 관내 각지의 교회 목사님들이 전원 검속되었다. 김형모 목사를 비롯하여 손양원, 선재련, 김순배, 나덕환, 오석주, 김정복, 김상두 목사와 중견 장로들이 모두 구금되었다. 그 까닭은 신사참배 거부와 미국의 스파이 노릇을 한다는 이유였다. 나이 어린 전도사가 검속된 김 목사를 대신하여 교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일은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순천노회 목사들이 모두 검속당하는 엄청난 사태였던 까닭에 장로들과 전도사들로 수습위원회를 조직하여 노회 내의 각 교회를 순회하기로 하였다. 나는 순천중앙교회 김정기 장로와 한 팀이 되어 고흥(高興) 지방의 교회들을 순회하였다. 일제 경찰은 목사들만 구속해 버리면 교회들이 굴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교회는 목사들이 없을지라도 전도사들과 장로들이 굳게 결속하여 지켜나가고 있었다. 일제는 전도사인 나에게까지 수시로 주재소(駐在所, 지서나 파출소에 해당)로 불러들여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협박했고 감시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주일예배 때 예배를 드리기 전에 동방요배(東方遙拜, 일본 황실을 향해 절하는 것)란 것을 강요하는가 하면 교회당 출입구의 좌우에는 '근로보국(勤勞報國)'이니 '국위선양(國威宣揚)'이라는 따위의 간판을 써서 달게 했다. 당시 벌교 지서에는 우리나라 형사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성이 위(魏)씨라고 하여 위 형사(魏刑事)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를 미행하고 감시하였다. 그러나 벌교읍 교회 최학언(崔學彦) 장로를 비롯하여 김아진, 조우암, 황봉익, 이사은, 박형수, 황재복 씨 등이 젊은 전도사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 일제 경찰의 가혹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었다. 비록 목사는 옥중에 있었으나 교회는 별일 없이 든든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하나님의 지켜주심과 둘째, 장로·집사들의 일치단결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생활고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전시하(戰時下)였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일제의 수탈에 우리 민족은 기아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식량이란 것이 대두박(大斗粕)이었는데 그것은 비료로 쓰는 콩깻묵이었다. - 박요한(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