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84)
	앵두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지난봄에 온 동네 처녀들 바람나게 할 만큼 하얀 꽃잎을 난분분하게 흩날리던 앵두나무에 빠알갛게 앵두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산그늘 깊어지는 뒷산 솔숲에서 접동 접동 애오라비 접동 접동새 소리 구슬픈 밤 앵두는 절로 익어갑니다.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깊은 밤에 앵두는 절로 익습니다. 앵두나무가 오래 되어서인지 잎은 무성한데 앵두는 별로 없습니다. 작고 앙증맞은 빨간 앵두가 초록 잎들 사이사이에 보석처럼 숨어있습니다. 앵두를 하나 따서 입에 넣어봅니다. 달큰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납니다. 새콤한 맛이 달큰한 맛을 이깁니다. 입안에 새콤한 맛이 더 오래 남습니다. 어릴 적 뒤란 담장 안쪽을 죽 둘러선 앵두나무가 생각납니다. 굵고 탐스러웠던 그 앵두는 신맛은 거의 없고 무척 달았습니다. 부친께선 널따란 집안 텃밭에 각종 유실수를 많이 심으셨습니다. 초여름에 익는 앵두를 시작으로 장마가 시작될 때 먹게 되는 살구와 벌레가 무척 좋아하는 복숭아, 종이 봉지로 싸주어야 껍질이 부드러워 맛이 시원한 배, 나무 근처에 만 가도 향긋한 향이 느껴지던 사과와 아침 일찍 나무 밑에 가보면 풀숲에 숨어 있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방금 떨어진 알밤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알밤을 물고 있는 밤나무.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뒤에 따먹는 홍시 감까지. 우리 삼남매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아니 겨울에는 화롯불에 아버지가 구워주시는 군밤까지 사시장철 과일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뿐인가요. 과일 나무들 사이사이에 딸기와 토마토, 참외와 수박까지. 아버지의 텃밭에는 먹을거리가 지천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청마루에 책가방 휙~ 던져두고 텃밭으로 가 잘 익은 커다란 토마토 하나 따서 국물 줄줄 흘리면서 먹고 숙제를 하든 뭘 하든 했습니다. 장마가 시작되는 이맘때가 되면 노랗게 익어가는 살구의 맛이 그립습니다. 말랑한 하얀 살구의 단 맛은 또 어떻구요. 입안에 침이 그득 고였습니다. 밤을 구워주시던 아버지는 이제 많이 노쇠해지셨습니다.
	한글학교 학생 마님들이 공부하러 거의 못 오셨습니다. 그 날은 그동안 막아 두었던 양식장을 터서 바지락을 캐기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온 동네 어촌계원들이 양식장 개펄에 조개 캐러 갔었습니다, 물론 한글학교 학생 마님들도 바지락을 캐러 갔지요. 마침 간물때(간조: 바닷물의 수위가 가장 낮아지는 때)가 다 저녁때여서 오후 8시까지 바지락을 캤답니다. 그날 캔 바지락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다 되어 가더랍니다. 공부하러 갈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일은 안 끝나고. 허리를 펴고 보니 열나흘 밝은 달빛이 바다 위로 흐르고 있더랍니다. 빠른 속도로 들이닥치는 밀물 위로 달빛도 함께 달리고 있더랍니다. 마음은 온통 공부방에 가 있어서 일이 손에 잘 안 잡히더랍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공부하러 가야겠는데 일은 더디고, 개펄 밖으로 데려다 줄 배는 아니 오고 그렇게 바다가 차오르는 달빛 속에 한참을 망연히 있었답니다. 한글 공부를 시작한 지 만 두 달을 지나고 있습니다. 학생 마님들의 학습 능력에 개인차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아이들 공부나 할머니들의 공부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께 배우는데 실력 향상이 저마다 다 다릅니다. 이제 보조교사가 더 필요합니다. 뒤떨어지는 진도를 따라잡아 주려면 보조교사의 나머지(?)공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박복덕 마님은 끈질긴 데가 있습니다. 발음이 잘 안 되는 글자는 될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그림과 함께 있는 ‘라디오’를 손으로 짚어보면 분명히 세 음절입니다. 마님이 알고 있는 그림의 물건은 ‘나죠’, 분명 두 음절인데, 나머지 한 음절은 뭐란 말인가? 그래서 이 그림에 있는 물건의 이름은 정확하게 ‘라디오’라고 레베카가 가르쳐줍니다. 마님들이 인지적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마님들이 가지고 있는 도식 속에서의 인지적 기대와 실제 경험하고 지각한 것 사이에 인지적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거의 50년이 넘는 세월을 [나죠]라고 발음했는데 이게 아니라니 ‘라디오’-[나죠?]-[라죠?]-[라됴?]-[라디오] 하고 또 하고 또 하고를 반복하고 반복해서 라디오를 제대로 발음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 합니다. 끈질김의 끝판 왕입니다. 아직도 연필 잡은 손이 조금 떨립니다. 평생 호미만 잡았던 손이니... 바지락 캐는 것보다 글씨 쓰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윤옥녀 마님은 길을 가다가 아는 글자가 눈에 띄면 신기하고 반가운가 봅니다. 글자를 몇 번씩 소리 내어 읽어 보곤 한답니다. 그런데 밑에 받침이 붙으면 무슨 글자인지 또 분간이 안갑니다. 그러면서 빨리빨리 공부가 늘지 않는다고 폭폭해 합니다. 이제 3개월 째 공부하고 있는데 아직도(?) 모르는 글자가 더 많다고 걱정이 대단합니다. 왜 이리 공부가 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입니다. 그러면서 또 ‘멍청해’서 그런가보다고 자아비판을 격하게 합니다. 그래도 윤옥녀 마님은 상위(?) 그룹에 속합니다. 이연애 마님, 이연애 마님의 호적 이름은 ‘옥인’입니다. 그래서 더 예쁜 이옥인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옥인 마님은 성실 그 자체입니다. 숙제도 정확하게 잘 해오시고, 결석도 한 번 안 하셨습니다.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인데 글씨는 어찌 그리 작고 반듯하게 잘 써 오시는지 놀랍습니다. 말씀이 별로 없으신 분이어서 잘 몰랐는데 지난 화요일에 오셨을 때 확인해 보니 자음 14개, 단모음 10개, 이중모음 11개를 모두 읽으십니다. [ㅔ]와 [ㅐ], [ㅒ]와[ㅖ] 발음이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 읽으십니다. 그리고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서 한 음절을 이룬다는 원리를 깨치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ㄱ+ㅏ=가, ㄱ+ㅡ=그,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글자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축하해주세요. 아직 받침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받침을 배우게 되면 한국어의 음절 구성인 자음+모음+자음(CVC) 규칙을 또 깨닫게 되겠지요. 여름방학이 오기 전에 놀라운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례 마님은 숫자 공부를 합니다. 집 주소, 생년월일, 전화번호 외워서 쓰기를 합니다. 그리고 1부터 100까지 숫자 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유순애 마님 유순애 마님이 제일 난항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한 사람 붙어서 개인 지도가 필요합니다. 김월옥 권사님이 유순애 마님 과외 선생님입니다. 집도 아래 위, 이웃에 살고 있어서 숙제도 봐주고 틀린 글자도 고쳐줍니다. 유순애 마님은 아직 글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순서와 상관없이 마님이 그리고 싶은 대로. ‘ㅏ’와 ‘ㅓ’ 도 구별이 안 되고 있어서 레베카의 애를 태웁니다. 정풍연 마님은 휴학 중입니다. 김옥자 마님은 남편 되시는 분이 병환 중이셔서 많이 빠졌습니다. 김영자 마님은 책 한권을 정해서 읽고 따라 쓰고, 받아쓰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한글학교 학생 마님들이 더딘 진도에 실망이 되는 모양입니다. 레베카도 슬슬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올 해 안에 읽고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마님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지.... 요즘 따라 밭일도 많고 갯가에 갈 일도 많아서 몸은 고되고 학업은 더뎌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집에서도 할 일이 많아 숙제는 거의 못해 옵니다. 금방 한글을 배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어서 실망이 되는 모양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 . . 중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고야 말리니 (삶, 푸시킨) 한글학교의 학생 마님들이 고단하고 힘든 오늘을 참고 견뎌 기쁨의 날을 어서어서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
	선유봉에서 바라본 망주봉과, 바닷물로 채워진 모래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