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82)
	어제는 이상한 안개가 오후 내내 섬을 점령했습니다. 바다로부터 짙은 海霧가 바람을 타고 뽀얗게 몰려오더니 삽시간에 섬을 점령해버렸습니다. 들어왔던 오후 객선도 섬에서 발이 묶여 육지로 회항하지 못합니다. 좀처럼 흔한 일이 아닙니다. 육지에서 들어온 객선은 웬만하면 육지로 회항을 하는데 어제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五里霧中은 커녕, 4~5백 미터 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학교 건물도 안개에 싸여 희미합니다. 우리 집에서 보니 바다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운동장으로 마구 마구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한낮인데 해는 빛을 잃고 중천에 하얗게 걸려있습니다. 낮달처럼. 해도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요? 빨래는 미처 걷지 못해서 이미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몸에 물 닿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 강아지 뿌꾸도 집안에 웅크리고 앉아 ‘우우’ 몰려다니는 안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잠깐만 밖에 있어도 머리카락과 눈썹에 하얀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힙니다. 이렇게 안개가 섬을 점령하는 날엔 바람이 숨습니다. 바람 없는 섬에 복병처럼 깔린 안개는 어둠이 내려도 물러갈 기세가 아닙니다. 안개에 어둠이 스미자 안개는 더 두터워지고 어둠은 묽어집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에 안개에 포위당한 섬은 저 홀로 깨어 있는 파수꾼 같습니다. 육지로 외로운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전령 같습니다. 이런 날은 바다에 나간 사람들이 안개 속에서 길을 잃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원근의 모든 산들이 사라진 바다는 아무것도 가늠할 수가 없어 텅 빈 상태가 됩니다. 등대의 불빛은 안개를 통과하지 못하고 선장의 시야는 동네의 불빛에 가 닿지 못합니다. 그럴 때 노련한 선장은 배의 엔진을 끄고 그 자리에 멈춰섭니다. 배가 멈춰 서자 일렁이는 뱃전으로 파도가 슬쩍 다가옵니다. 물결이 흐르는 대로 배를 맡겨둡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건듯 불었을까요? 안개가 슬쩍 걷혀 높은 산봉우리가 드러나면 가늠을 합니다. 저 봉우리가 어느 산의 봉우리인가? 이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축항에 다다르면 온 몸은 안개에 젖어 물 먹은 솜처럼 무겁습니다. 기진맥진한 선장이 축항에 배를 댑니다. 축항을 서성이던 그의 아내가 벌이줄을 묶습니다. 그리고 닻을 내려 배를 쉬게 합니다.
	레베카는 매일 오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선유도 초등학교에서 돌봄 교실 강사 일을 합니다. 장자도에서 선유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채원이와 아현이, 도원이가 돌봄 교실에서 숙제도 하고 취미활동도 하고 때로는 맛있는 간식도 먹고 놀기도 합니다. 아현이와 도원이 뒤를 이어 아현이 동생 채원이가 올해 선유도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동글동글 귀여운 채원이는 일곱 살인데 장자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옵니다. 내가 채원이의 팔과 다리를 슬쩍 만져보았습니다. 어느 새 근육이 생긴 걸 까요? 햇볕에 까맣게 탄 채원이의 팔과 다리가 단단합니다. 아침과 저녁 등하굣길의 유산소 운동으로 다져진 팔과 다리의 근육이 만져집니다. 어찌나 씩씩하고 활달한지 채원이와 있으면 건강한 에너지가 막 전달됩니다. 어느 날 채원이가 돌봄 교실 선생님 레베카에게 자신은 행운아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담임선생님께서 자기를 예뻐해 주시고, 방과 후에 검도를 가르쳐주시는 사범님께서도 귀여워해 주시고 돌봄 선생님의 사랑도 많이 받으니 행복하다고 말하더랍니다. 채원이는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밝은 아이입니다. 채원이의 언니 아현이는 4학년입니다. 도원이도 4학년입니다. 도원이와 아현이는 4년 째 짝꿍입니다. 공부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검도도 같이 배웁니다. 레베카의 돌봄 교실에서도 도원이와 아현이는 짝꿍입니다. 도원이는 그 또래의 사내아이들처럼 점점 장난 끼가 늘어갑니다. 가끔 이유 있는 반항도 합니다. 아현이는 점점 소녀가 되어갑니다. 아현이는 차분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잘 합니다. 레베카는 뭐든 아현이에게 맡기면 안심하는 눈치입니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드릴 함께 만든 사탕부케도 아현이에게 맡깁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기 전에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금요일에 오시는 검도 사범님과 방과 후 선생님께도 잊지 말고 드리라고. 아현이에게 책임을 지워줍니다. 레베카의 영어 교실에 오는 아이들 중에 찬이가 있습니다. 사형제 중 두 번째인 찬이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입니다. 어렸을 때 엄마의 무릎을 두 살 터울 동생에게 양보하고 엄마의 언저리에서 서러움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흐르는 눈물을 들킨 찬이가 그래도 나름 씩씩하게 내뱉은 말이 ‘왜 자꾸 눈물이 나지’였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눈물에 대한 변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함께 밥 먹을 때마다 제 무릎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랬던 찬이가 레베카가 복도에 나타나면 지난주에 배운 영어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곤 한답니다. "Doe, a deer a female deer~~ Ray, a drop of golden sun~~" 그리곤 슬쩍 레베카를 돌아다보곤 막 뛰어간답니다. 입가에 수줍은 웃음을 물고. 마치, ‘선생님, 저 지난 주에 배운 영어 노래 다 외웠어요.’ 하는 것처럼. 레베카가 집에 돌아와 ‘엄마, 찬이 넘 귀여워요.’ 합니다. 찬이 동생 1학년 온이는 레베카를 보기만 하면 “I'm hungry" 하며 어리광에 응석까지 부린답니다. 너무 hungry해서 책을 못 읽겠다고 하는 온이의 학습동기를 북돋워 주는 약은 “오늘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끝나고 상이 있을거예요.” 하면 갑자기 온이의 책 읽는 소리는 낭랑해진답니다. 자주 울어서 레베카를 당황스럽게 했던 현민이가 어느 날 코팅 퍼머를 한 레베카를 빤히 쳐다보더니 “누구세요?”하고 농담을 하더랍니다. 매주 영어책을 집에 두고 오는 서율이, 그리고 안 가지고 온 것을 자랑삼아 보고하는 천진한 서율이, 영어를 아직 잘 못 읽는 서율이와 현민이의 책에 한글로 발음을 달아주는 친절하고 사려 깊은 건이. 6학년 건이가 레베카를 보면 여기가 뛴다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며 ‘엄마 이게 무슨 감정이예요?’하고 물어보더랍니다. 해서 우리 모두 拍掌大笑 했습니다. 건이 여자 보는 눈이 꽤 높습니다. 건이는 달콤 쌉쌀한 첫사랑을 느끼는 사춘기로 진입한 것 같습니다. 바나나를 버내너로 발음하는 예성이 어느 날 초등학교 교문 앞에 난자 당한 병들이 널려 있더랍니다. 주범을 찾고 보니 안예성 솜씨, 그 애 아버지가 화가 나서 아들을 데리고 교문 앞 청소하러 가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아빠, 병을 던지니까 퍽 터지는 게 꼭 수류탄 같았어” 하더랍니다. 그 애 아버지가 가만 생각해 보니 ‘꽤 재밌었을 것’ 같았답니다. 父傳子傳, 예성이 아버지도 한 번 해 보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제스처와 연기가 수준급인 예성이는 귀여운 악동에서 거친 소년으로 가고 있습니다.
	은행나무가 무성한 은행잎으로 뒤덮였습니다. 잎이 나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무성해졌습니다. 사월의 꽃이 진 자리에 초록이 가득합니다. 오월은 푸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있습니다. 레베카의 돌봄 교실과 영어 교실에 오는 아이들도 자라고 있습니다. 각자의 색깔과 개성을 가지고 쑥쑥 크고 있습니다. 레베카, 아이들 때문에 행복해 합니다. 지금 선유도는 푸르고 푸른 아이들의 계절.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