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86)
	태풍 나크리가 북상하고 있습니다. 일본 열도를 벗어난 나크리는 제주도 남쪽 해안까지 북상했습니다. 대나무 숲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마당의 꽃과 나무들이 바람 속에서 위태롭습니다. 나무들이 이 태풍을 잘 견딜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비를 잔뜩 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섬 전체를 휩쓸고 있습니다. 벌써 바다는 하얗게 뒤집어졌습니다. 이 바람 속에서 배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요? 느리게 북상하는 나크리는 주일 밤 쯤 우리가 살고 있는 고군산을 통과할 예정이랍니다. 금요일 밤,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레베카의 친구들이 영어 캠프 지원을 위해 군산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토요일 이른 아침, 일기 예보 대로 모든 여객선은 끊겼고, 레베카는 낙심천만한 얼굴입니다. 레베카의 아버지가 군산에 와 있는 레베카 친구들을 데리러 육지로 나갔습니다. 마침 등대 횟집에 온 손님이 육지로 나가는 길에 레베카의 아버지도 함께. 신치에서 신시도 동네까지는 차를 얻어 타고 바람 심하게 불어 파도 하얗게 뒤집어진 바다를 건너 레베카의 친구들이 무사히 섬에 들어왔습니다. 레베카 친구들 배 타고 오는 길이 놀이기구를 탄 것 같았다나요. 레베카 아버지의 속은 시커멓게 탔는데.
	어제 오후, 태풍 나크리는 열대저압부로 약화되어 소멸되었습니다. 고군산 군도까지 북상하지 못하고 목포 앞 바다 어디쯤에서 사라졌습니다. 아직 간간히 뿌리는 빗속에 장자도와 무녀도에서 아이들이 하나 둘 학교로 옵니다. 유치원생 엔이로부터 중학교 3학년 예진이까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생애 첫 영어 캠프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각자 영어 이름을 정하고 멋지게 이름표를 달았습니다. 영어로 자기소개도 하고 밥 먹기 위해 짧은 영어 명언도 외우고 영어 노래도 부르고 메이킹 멜로디와 호키포키 음악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고 함께 그림도 그리고 밥도 같이 먹고 게임도 팀으로 하고 돌아가며 롤링 페이퍼에 칭찬 글도 쓰고 1학년 온이는 형과 누나들에게 칭찬을 한 문장씩 또박또박 써 넣었습니다. 온이가 느낀 그대로 좋은 점을 하나 씩 찾아내어 형과 누나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선생님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글씨를 모르는 엔이는 롤링 페이퍼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엔이의 사인처럼. 모든 롤링 페이퍼에 엔이의 그림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현민이는 할머니와 살고 있습니다. 다리가 긴 현민이는 무릎을 세우고 앉으면 귀가 무릎에 닿습니다. 눈물도 많고 자신감도 없습니다. 현민이의 영어 speech 주제는 ‘가장 행복했던 날’입니다. 현민이는 캠프 첫 날 한 풍선놀이를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교실에는 음악이 흐르고, 음악소리를 음표들이 떠다니는 것으로 시각화했습니다. 그림을 어찌나 생동감 있게 그렸는지 풍선 놀이를 하는 그림 속 아이들이 걸어 나올 것만 같습니다. 풍선도 두둥~ 떠 있습니다. 현민이의 그림 속에는 이야기가 풍성합니다. 그림을 통해서 현민이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그림을 잘 그리는 현민이는 5학년입니다. 서율이는 중학교 1학년 형아의 롤링 페이퍼에 ‘형아가 전에 내게 나쁘게 군적이 있어도 나는 형아가 좋아’ 라고 썼습니다. 레베카가 서율이의 글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합니다. 서율이의 이 한 문장 속에 아량과 포용이 들어 있습니다. 서율이는 이제 2학년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쓸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서율이는 계절 중에서 봄과 여름, 겨울을 좋아합니다. 봄이 좋은 이유에 대해서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봄비가 좋아서’ 라고 합니다. 어찌나 솔직하고 야무지게 말하는지 저도 막 봄비가 좋아지려고 합니다. 에성이가 존경하는 사람은 단짝 친구 건이 예성이의 영어 speech 주제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예성이가 건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친구를 존경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말 할 때의 당당한 눈빛과 단번에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안예성 짱이었습니다. 찬이는 다 외워서 왔는데 떨려서 보고 읽었습니다. 읽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습니다. 미래의 학자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찬이는 레베카의 롤링 페이퍼에 ‘이 summer camp의 즐거움은 선생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라고 써서 레베카를 울렸습니다. 모든 수고를 잊게 했습니다. 민영이의 speech 주제는 시간여행입니다. 민영이는 아기였을 때로, 칭찬과 격려를 많이 받았던 초등학교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덜 바쁘실 때 함께 산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꽤나 긴 문장을 다 외워서 하느라 진땀을 흘린 성실한 민영이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현재라고 생각한다.’ 고 마무리합니다. 도원이는 ‘나?’에 대해 진지합니다. 자신을 탐구하는 일에 진지합니다. 도원이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날 캠프가 끝나는 날도 비가 세차게 왔습니다. 장자도에서 세찬 비를 맞고 온 도원이는 우울한 얼굴이더니 급기야는 울음이 터졌습니다. 도원이의 눈물에 선생님들은 당황했고, 혜원 샘이 도원이를 달래느라 애를 씁니다. 그래도 도원이 울면서 할 건 다했습니다. 울면서 영어 speech 도 했고 울면서 노래도 부르고 울면서 메이킹 멜로디와 호키포키 춤도 췄습니다. 그래도 집에 갈 땐 맑은 얼굴로 갔습니다. 건이는 선생님들의 롤링 페이퍼에 샘들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남겼습니다. 불후의 삼행시로 선생님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예진이, 점점 예뻐지는 예진이는 세계여행을 꿈꿉니다. 여성성이 활짝 피어나고 있는 예진이는 맏언니답게 의젓합니다.
	아직 꿈꾸는 아이들이 있어서 섬에 희망이 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감사를 표현 할 줄 아는 어린 시인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지금 선유도는 또 雨中.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