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77)
	선유도에 이사 와서 처음 7년 간 살았던 옛집을 헐고 그 집터에 여러 가지 야채들을 심었습니다. 여름내 아침마다 작은 칼과 바구니 하나 들고 텃밭에 가면 싱싱한 야채들을 금방 한 바구니씩 뜯어가지고 와서 상을 차리곤 했습니다. 상추, 쑥갓, 치커리, 청경채, 겨자채, 부추, 가지, 호박, 들깨, 아욱, 옥수수, 오이, 방울토마토 파, 고구마, 고추, 콩.... 샐러드 소스와 조리법을 바꿔가며 여름 내내 풍성한 채식을 했습니다. 점심에는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 아래 평상으로 밥상을 들고 나가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둘만의 외식을 하곤 했습니다. (손님이 있는 날 저녁엔 숯불에 새우와 조개를 굽기도 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손을 뻗어 방울토마토 몇 개 따서 후식으로 먹고 밥그릇을 슬쩍 밀어 놓고 앉은 자리에 그냥 드러누워 매미소리를 들으며 스르륵 눈을 감고 단잠을 자기도 합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된다.’는 어른들 말씀이 생각나서 한 마디 했더니 남편이 “I am 소”하면서 스르륵 눕더군요. 그 소 옆에 저도 누웠습니다. 바람은 솔솔 불고, 하늘은 파랗고, 매미는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주고. 금새 남편이 낮게 코를 곱니다. 그늘이 점점 줄어들어 평상이 뜨거워지면 점심상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수련회 팀이 없는, 휴식 같은 중간 중간의 날들을 텃밭 언저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은행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고, 박주는 없고 소찬으로 외식을 하고, 해거름의 다 저녁때는 바다에 수영을 하러 가곤 합니다. 수련회 팀이 있을 때는 그 은행나무 그늘에서 목사님들께 막 구운 쿠키와 커피를 대접하기도 하고, 미숫가루를 얼음물에 타서 대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무 그늘은 그분들에게 빌려 주고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가지요. 조그만 텃밭에 열 가지가 넘는 채소들이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 가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큰 태풍이 세 번이나 훑고 지나갔는데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던 호박은 찬바람이 나고야 전성기를 맞은 양 호박을 주렁주렁 열어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가지의 순마다 등불처럼 환한 노란 꽃을 피우고 꽃이 지기도 전에 동그란 호박을 물고 있는 것이 어찌나 귀엽고 신기한지요. 또 자라는 것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아침에 한 번 따고 저녁 때 살펴보면 그새 자라, 따야 할 호박이 또 있습니다. 마치 몸을 숨기듯이 호박잎으로 슬쩍 몸을 가리고 있는 호박을 찾아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긴 막대기로 호박넝쿨을 헤치고 호박을 찾아내면 슬몃 웃음이 나옵니다.
	어느 날 저녁 때 박정곤 집사님 내외분이 고구마를 심어 주러 오셨습니다. 밭고랑을 내고 두둑을 치고 고구마 묘목을 꽂아주셨습니다. 고구마는 두둑을 치고 심더군요. 달포가 넘도록 비 한 방울 오지 않던 가문 때였습니다. 고구마를 다 심고 나서 “사모님, 매일 물 한 번씩 주셔야 합니다.” 하고 가십니다. 그날은 집사님이 물을 흠뻑 주고 가셨습니다. 다음날 보니, 벌써 비실비실 말라가는 고구마 순이 더러 있습니다. 해가 지자마자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두어 주 쯤 지나자 이제 땅 기운을 맡아서 물은 그만 주어도 된다고 합니다. 아마 뿌리도 내렸을 거랍니다. 정말 뿌리가 내렸을까? 하나 슬쩍 뽑아보았더니 아, 정말 하얀 실뿌리가 솔솔 자라고 있습니다. 어마나! 화들짝 놀라 미안한 마음에 얼른 도로 심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흙을 꼭꼭 눌러주고 물을 한 바가지 부어주었습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여름 수련회 시기가 지나자 햇빛도 한결 누그러졌습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텃밭의 주인들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홍경희 집사님과 김용희 집사님이 딱딱하게 굳은 땅을 괭이로 파고 밭 가운데 있던 부추를 가장자리로 옮겨 심고 부추가 있던 자리에 파를 심어주십니다. 부추는 다년생이어서 가장자리에 심어야 효율적이랍니다. 샐러드로 먹던 채소들 대신에 경종(배추)과 당근과 시금치 씨앗을 뿌렸습니다. 추석 무렵이 되자 밭 가장자리로 둘러 심은 옥수수가 누렇게 변해갑니다. 지난 태풍 때 쓰러진 것이 많아 대충 일으켜 세워놓았는데 꽃을 피우더니 수염을 단 옥수수 자루가 보입니다. 옥수수 껍질이 누렇게 된 것을 따서 까 보았더니 보라색 알이 쪼르륵 박힌 조그만 옥수수가 단단하게 여물었습니다. 너무 작아 안 여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기심에 작은 것들도 모두 따서 까보았더니, 세상에나!! 내 검지손가락 길이보다 작은 옥수수들도 모두 단단하게 여물었습니다. 종족본능이었을까요? 태풍에 휩쓸리고, 짧아져 가는 해 길이에 위기를 느껴 다 자라지도 못하고 서둘러 익어버린 옥수수가 애잔합니다.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강원도 어디쯤엔 얼음이 얼 것이라는 소식이 있던 다음 날 박집사님이 고구마 캐러 오셨습니다.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호미로 흙을 살살 파자 빨간 고구마가 보입니다. 내 손길이보다 더 긴 고구마가 줄줄이 서 있습니다. 고구마가 땅 속에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똑 바로 서 있는 게 너무 신기합니다. 올해 가물어서 고구마 밑이 안 들었다는데, 우리 집 고구마는 굵게 밑이 들었습니다. 고구마를 캐는 박집사님 얼굴이 흐뭇합니다. 특별히 손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채소가 있고, 벌레가 좋아해서 온통 구멍투성이인 채소가 있습니다. 같은 환경인데 못나 꼬부라진 채소가 있고, 그냥 두어도 저절로 잘 자라는 채소가 있습니다. 사실 호박은 일부러 심은 것보다 작년에 호박죽 끓여먹으려고 속을 파서 버린 곳에서 난 것이 더 많았습니다. 밭도 아닌 대나무 숲에 버린 것인데 그 대나무들 사이에 소복하게 난 호박이 너무 배게 났다고 정풍연 권사님이 솎아내고 주위에 대나무가지들을 잘라주었더니 순을 내고 꽃을 피워 호박을 열었습니다. 거저 얻은 셈이지요. 텃밭이 목회현장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라는 성도가 있고, 애면글면 다루어야 할 성도가 있습니다. 그냥 두어도 둥글둥글 자라는 성도가 있고, 십 년이 그날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고구마는 물만 주었을 뿐인데 땅 속에서 실하게 자라 우리가 수고한 것보다 넘치게 수확을 했습니다. 고구마뿐 아니라 텃밭의 모든 채소들도 그렇습니다. 물을 주어야 할 때, 지지대를 해주어야 할 때, 곁순을 쳐주어야 할 때, 그리고 거름을 주어야 할 때를 알아서 제때에 해 주는 일이 농사라면 찾아가 위로해야 할 때와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때, 그리고 훈련하여 굳게 할 때를 알아서 주님의 제자로 양육하는 것이 목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잘 알아 듣는 것이 성령사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구마를 살찌운 것이 내가 아니었듯이 성도를 자라게 하는 것도 결국 내 몫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물을 주어야 할 때를 맞춰 물을 주듯, 주님이 말씀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사역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임을 배웁니다. 지금 선유도는 찬비가 내립니다. 이 비 그치면 한발자국 겨울이 다가오겠지요?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