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88)
	어느 날 여름이 끝나가는 어느 날 저녁 저녁기도를 마치고 교회에서 내려오다가 반딧불이를 보았습니다. 꼬리에 환하게 불을 밝힌 반딧불이가 유영하듯 우아한 모습으로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뒷산 솔숲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의 세레나데(小夜曲)가 들려오고 깜깜한 그믐밤에 빛을 뿌리듯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녀석은 풀숲에 내려앉아 가만히 쉬기도 합니다. 어둡던 풀숲 주위가 환해집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밝은 불빛으로 그녀석의 뱃속이 보이는 듯합니다. 한 밤에 들리는 산새의 애틋한 세레나데와 반딧불이의 우아한 유영이 여름밤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여름밤을 특별하게 합니다. 산새의 세레나데에 맞춰 우아한 유영을 하는 반딧불이의 춤을 한참 보다가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조금 호젓했습니다. 세월 호 침몰 사고의 여파로 섬으로 더위를 피하러 오는 피서객들의 발걸음이 뜸했습니다. 해마다 여름 수련회 팀들로 몸살을 앓던 교회도 오랜만에 조용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말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여름 한 철 벌어 일 년을 먹고 사는 가게들과 민박집들은 울상입니다. 중간에 열대 저압부로 바뀌어 사라지기는 했지만, 태풍 소식도 다른 해보다 잦았습니다. 바다에서 유야무야해진 태풍들이 그냥 사라진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태풍이 사라질 때마다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습니다. 어느 날은 들이 붓듯이 비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지난여름엔 물 걱정을 덜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호젓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선유도에서 스물일곱 번의 여름을 보내면서 올 해처럼 한가한 여름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바닷가 모래밭에 한 가득 펴지던 알록달록한 텐트들이 올 해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수욕장에 바글바글하던 인파들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 저녁 때 바다로 수영을 하러 가면 철 지난 여름 같았습니다. 그 호젓함에 살짝 쓸쓸해집니다. 역시 여름 한 철엔 사람이 많이 와야 좋습니다. 그래야 선유도가 쓸쓸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더 아름다워집니다. 물 빠지면 드러나는 하트 모양의 모래 언덕이 더 근사해집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 첫 째 주 화요일에 한 달 간의 여름방학을 끝내고 한글학교가 개학을 했습니다. 더운 여름을 손님들과 부대끼며 고단하게 보내고 공부하러 온 한글학교 학생 마님들의 얼굴이 검게 그을렸습니다. 마님들에게서 강한 햇빛 내음이 납니다. 피곤하고 힘이 들 텐데도 배우려는 열망이 앞서 모두들 즐거운 얼굴들로 공부방에 왔습니다. 김월옥 권사님과 한 동네 사는 마님들은 짬짬이 틈을 내서 권사님 댁에 모여서 배운 것을 복습한 모양입니다. 공부한 내용들을 방학 동안에 다 까먹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습니다.
	박복덕 마님이 병원에 다녀오셨던 가 봅니다. 늘 상 다니시던 병원에 다녀오셨습니다. 외래환자 진료카드에,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박복덕’을 썼다고 감격해 하십니다.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떨리는 손으로 직접 진료 신청 카드에 이름 석자를 버젓하게(?) 기록했다고 좋아하십니다. 어린아이처럼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옆에서 보고 있는 학생 마님들이 내 일인 양 같이 기뻐해줍니다. 기쁨이 두 배가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아홉 배가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두 팔 벌려 이~~ 만큼 , 터질 듯 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처음으로 이름을 썼다고 공부방에 와서 자랑을 하던 날, 박복덕 마님의 얼굴이 어린 아이 같이 빛났습니다. 설렘으로 밝게 상기된 어린 아이 같았습니다. 꿈꾸는 소녀 같았습니다. 어느새 마님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합니다. 요즘은 “나는 선유도에 살고 있습니다.”를 배웁니다. 윤옥녀 마님은 동네 회관에 붙어 있는 ‘선유도-’ 간판을 보고 신기해합니다. 어제 배웠던 글자가 오늘 보니 ‘떡하니’ 거기에 있는 거예요. 이제는 ‘선유도’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는 만큼 보입니다. ‘선유도’라는 글자가 장기 기억 속에 확실하게 저장되었습니다. ‘선유도-’라고 써 있는 간판을 소리 내어 자랑스럽게 읽으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하하’ 웃는답니다. 그래도 마님은 즐겁습니다. 자신이 글을 읽는다는 사실이 즐겁습니다.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현실이 행복합니다. 남들이 웃든 말든, ‘선유도-’라는 글자가 보이면 큰 소리로 읽습니다. 군산 시내에 나가서 차를 타고 가다가도 아는 글자가 보이면 큰 소리로 읽는답니다. 남들이 뭐 좀 웃으면 어떻습니까, 배우는 즐거움, 알아가는 기쁨으로 행복하면 되는 것을요. 더불어서 마님들이 육지에 나갈 때 타고 다니는 배의 이름을 배우고 있습니다. “옥도 훼리 호, 코스모스 호, 진달래 호” 이제는 배의 모양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써 있는 배의 이름을 보고 알게 되겠지요. 이병례 마님은 책 읽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전에는 글을 읽으면서도 내용 파악은 안 됐었는데 이제는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된답니다. 책 읽기가 이리 재미있는지 몰랐다고 하면서 즐거워합니다. 연필 한 자루가 몽당연필이 되도록 집에서 열심히 ‘쓰기공부’도 합니다. 레베카가 즐거운 얼굴로 새 연필을 연필 깎기로 깎아서 필통에 넣어줍니다. 새 공책도 한 권 가방에 넣어줍니다. 그렇게 조금씩 느리게 한 자 한 자 글자를 배워갑니다. 글자의 세계를 여행합니다.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또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지금 선유도는 국화 향 그윽한 가을 아침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