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76)

결국 그 높다란 말캉이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컴컴한 재래식 부엌도... 유일하게 봉창이 달린 집에서 나무로 불을 때고 살던 한순이 집사님 집은 통계에서 ‘민속촌’으로 불렸었지요. 군산 아들네라도 갈라치면 삽짝을 반쯤 지쳐놓아 사람이 없다는 표시를 해두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 굴뚝에 연기가 오르면 ‘아, 맹섭 어매가 들어왔군’하고 알아차리게 되곤 했지요. 이 년 전 서로 등 기대고 의지하던 영감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맹섭 어매 한순이 집사님은 아침저녁으로 지팡이 짚고 혼자 삽짝을 나서서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 돌곤 합니다. 운동회 날 백군 아이들처럼 하얀 띠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 짚고 천천히 동네 고샅길을 걸어갑니다. 늘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운 맹섭 어매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외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가야, 겨울이 어떻게 오는지 아니? 겨울은 하얀 할머니가 지팡이로 땅을 톡톡 치면서 온단다. 겨울이 긴 것은 할머니가 너무 늙어서 빨리 걸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 잘 들어보렴. 조용한 겨울밤이면, 할머니가 지팡이로 땅을 톡톡 얼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게야. 잠 안 오는 깊은 겨울밤 호올로 잠에서 깨어 겨울 할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창호지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앉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문 앞에 쪼그려 잠이 든 아이를 보고 놀랐다는 얘기를. 그렇게 천천히 힘겹게 걸어갑니다. 교회에 올 때도 머리에 묶었던 하얀 띠만 풀어놓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힘겹게 계단을 올라옵니다.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있는 재래식 변소에 가서 소매 보고 교회 안으로 들어옵니다. 새로 지어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시라고 해도 굳이 계단을 몇 개 더 올라가야 하는 재래식 변소로 갔다 옵니다. 맹섭 어매 한순이 집사님 참 정이 많았던 분입니다. 옆집 사는 임미라 집사님이 늘 하는 얘기 한 자락이 있는데요. 임미라 집사님이 섬으로 시집 와서 살던 섬사람 신인시절 그러니까 사십 몇 년 전 그때는 여자들이 나무도 해다가 불 때고 밥도 해먹고 했다네요.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눈에 콩깍지 씌워 얼른 시집이라고 와서 보니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는데 그 중에 나무해서 불 때 밥해먹는 게 젤루 힘이 들었답니다. 동네 여자들이 주르르 산으로 나무하러 가면 같이 나섰는데 낫질도 잘 못하지 나뭇단도 잘 못 묶지, 머리에 임질도 어정쩡하지. 그 어설픈 나무꾼 새댁을 가엾게 여긴 맹섭 어매가 자기 나무 다 해놓고 임미라 집사님 나무해서 묶어서 머리에 얹어주면 집에 오곤 했답니다. 가을이면 힘겹게 지은 고구마, 참깨, 콩 등을 목사님 잡숴보시라고 한 망태기 가져다줍니다. 먹을 줄만 알았지 갈무리를 잘 못하는 제게 ‘고구마는 얼면 썩어서 못 먹으니 꼭 따스한 방에 들여 놓으라’합니다. ‘네’하고 대답은 잘 했는데요. 전 고구마를 방에 한 번도 안 들여 놓았더랬어요. 베란다에 둔 채 그냥저냥 성탄 연습하러 오는 아이들과 빨리 먹어치우거나 했지요. 한동안 큰 아들이 연락이 안 돼서 애를 태운 적이 있었습니다. 딸 둘은 시집가서 잘 살고 둘째 아들 맹섭씨도 베트남 신부 얻어서 잘 사는데 큰 아들이 어디서 무얼하고 지내는지 몰라서 애간장을 끓였습니다. 한순이 집사님의 오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렇게 애타하던 큰 아들 소식도 알게 되고 맹섭씨는 예쁜 딸을 얻어 돌이 다가오는데... 그런데, 결국 그 높다란 말캉이 문제였습니다. 가뜩이나 기운 없고 어지러운 집사님에게 높은 마루를 오르내리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겝니다. 그 날도 임미라 집사님이 밤에 한순이 집사님 집에 전화를 했더니 말캉에서 내려서서 부엌엘 들어가다가 넘어졌다고 하더랍니다. 아침에 일찍 가보았더니 이미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해양파출소에 연락해서 경비정에 태워 육지로 호송을 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가족들에게 마음에 준비를 하라고 해서, 중환자실에 누운 집사님을 보려고 갔습니다. 부어서 그런지 집사님의 얼굴이 주름 하나 없이 매끔합니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집사님의 손과 발을 가만히 만져 보는데 가슴을 관통해서 올라오는 뜨거움이 왈칵 치밀어 오릅니다. 평소의 소원대로 ‘너무 오래 아파서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엿새 동안 자식들 수발 받다가 너무나 편안히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집사님 집에서 올라오는 하얀 저녁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겁니다. 굳게 닫힌 삽짝 안 처마 밑에 늙은 호박고지들이 줄줄이 걸려있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지막(?) 심방 예배를 드리던 날 말캉에 수북히 쌓아놓은 늙은 호박을 보면서 저 무거운 걸 밭에서부터 어떻게 가져왔냐고 제가 물었더니 며칠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날랐다고 했습니다. 그 말끝에 ‘저걸 내가 다 먹고 갈라나 모르요.’하시더군요. 동네 사람들 말을 들으니 쓰러지기 전 날까지 늙은 호박 껍질 벗기고 속 파내고 썰어서 저렇게 널어놓았답니다. 집사님 장례식 치르고 사흘 후 맹섭씨가 우리 집에 왔었는데요. 목사님과 저를 초대했어요. 집으로 월남쌈 먹으러 오라고.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