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83)
	작년 봄에 이관례 권사님 댁 마당에서 옮겨다 심은 노란 수선화가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맞추어 꽃잎을 열었습니다. 계단을 없애고 길을 내느라 마당에 지각변동이 생겨서 노란 수선화가 다 없어졌습니다. 작년과 재작년 봄에는 우리 집 마당에서 노란 수선화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맞추어 꽃잎을 열던 그래서 그 해에 가장 먼저 핀 수선화는 언제나 ‘내 꽃’이었는데. 봄이면 우리 집 뜨락을 별 밭으로 만들어 주던 노란 수선화가 없으니 마당이 어찌나 심심하던지요. 새벽에 교회에 가려고 나오면 코끝을 스치는 하얀 수선화 향도 맡지 못한 지가 두 해가 되어갑니다. 손톱 모양의 하현달이 서쪽 하늘에 그림같이 걸려 있는 시간, 아직 식물들도 잠을 자고 있는 새벽, 그 신 새벽빛 속에 고요히 서 있는 하얀 수선화의 우아한 향이 사라진 마당이 어찌나 황량해 보이던지요. 그래서 수선화 꽃이 지기를 기다려 알뿌리를 옮겨다 심었습니다. 드문드문 띄엄띄엄 알뿌리를 묻어두었더니 기특하게도 올 봄에 꽃을 피웠습니다. 한 줄기에 하나씩 꽃대를 세웠습니다. 며칠 전 남편과 같이 망주봉을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선유도의 랜드 마크인 망주봉은 바위로 된 커다란 돌산입니다. 망주봉 아랫녘엔 소나무와 갈참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중턱쯤엔 거기에도 소나무와 칡넝쿨이 공생 하고 있습니다. 봉우리 쪽으로 오를수록 흙은 거의 보이지 않는 민둥 돌산인데 그 민둥 돌산에도 키 낮은 소나무들이 붙어살고 있습니다. 발붙이고 뿌리내리면 살아지는 게 식물이라지만 그 질긴 생명력이 가히 경이롭습니다. ‘망주봉에도 진달래가 피네’ 무심한 남편이 심심하게 꽃구경을 합니다. 봄이 되니 그 민둥 돌산에도 진달래 꽃불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어마나! 바위에도 꽃이 피네’ 한 옥타브는 올라간 호들갑으로 내가 꽃구경을 합니다. 4월에는 바위에도 꽃이 핍니다. 다른 계절에는 그 나무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봄이 되면 꽃불로 타오르는 진달래를 볼 때마다 ‘아, 너 거기 있었구나!’하고 놀라워합니다. 위태롭게 바위에 붙어살면서도 봄이 되니 꽃을 피웁니다. 바위틈에 길게 뿌리를 내리고 세찬 겨울바람을 이기고 꽃을 피웠습니다. 꽃을 피워 자신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진달래가 고맙습니다.
	한글학교가 문을 열던 날은 통계 가는 길에 벚꽃이 활짝 꽃잎을 터트렸습니다. 화사한 꽃길이 되었습니다. 선유도 교회 교육관 벽에 풍선 장식을 하고 ‘축 입학’ 글씨도 써서 붙이고 ‘가나다라 바다학교’ 선유도 공부방 입학식을 조촐하게 했습니다. 목사님이 환영인사를 합니다. ‘용기 있는 결단을 해 주신 여러분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한글학교 선생님인 레베카가 인사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쿠키를 구워왔습니다. ‘제자훈련이 없는 화요일엔 저도 와서 기쁘게 돕겠습니다.’ 반장 부반장도 뽑았습니다. 반장은 김영자 마님, 부반장은 윤옥녀 마님 손수건 대신 명찰도 만들어서 목에 걸고, 예쁘게 사진도 찍었습니다. 이병례 마님은 입술연지를 바르고 오셔서 모두들 예쁘다고 한 마디씩 해주었습니다. 입학원서 서명란에 삐뚤빼뚤 각자의 이름도 그려(?)넣었습니다. 열심히 배우겠다고 오른 손 들고 서약도 하였습니다. 입학 소감을 한 마디씩 나누었습니다. 반장 김영자 마님은 읽기는 조금 하는 분입니다. 받침 있는 글자와 ‘내’와 ‘네’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듣고 쓰기를 못해서 왔다고 수줍게 말씀합니다. 반장인 김영자 마님은 한글학교 오는 날을 잊지 않고 있다가 전화로 모두에게 연락을 해줍니다. 부반장 윤옥녀 마님은 아주 활달한 분입니다. 글을 모르니 아주 폭폭한 육십 평생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왜 한글은 안 가르쳐 주는지 모르겠다고 교회에 오시는 분에게 말했던 것을 전해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꿈을 꾸어도 꿈속에서도 한글을 모르더랍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글을 모르는 자신의 신세가 한스러워 울기도 많이 했답니다.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꿈에서도 글을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했을까 새삼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이젠 이번 기회에 한글을 꼭 익혀서 보란 듯이 살아 보겠답니다. 의욕이 대단한 마님입니다. 또 얼마나 재미있으신지 종종 공부방을 웃음바다로 만듭니다. 숙제도 얼마나 잘 해 오시는지. 레베카 말이 머지않아 읽고 쓰시게 될 것 같답니다. 유순애 마님은 어릴 때 학교에 보내달라고 하면 ‘지지배는 살림만 잘 하면 된다.’고 무슨 학교냐고 부모님이 그러실 때마다 울었답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답니다. 그날도 서러운 눈물을 보입니다. 박복덕 마님은 평생 일만 하던 손에 연필을 잡으니 자꾸 떨린다고 합니다. 그래도 숙제장에 빼곡히 쓴 ‘ㄱ ㄴ ㄷ ㄹ’ 이 반듯반듯합니다. 한 자 한 자 읽으면서 꼭꼭 박아 씁니다. 교회에 오고 싶어도 읽을 줄 몰라 창피해서 못 오신답니다. 글 잘 배워서 교회에 오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연애 마님은 부모님이 가난해도 남자 형제들은 눈을 떠야 한다고 학교에 보내주고 딸은 집에서 살림만 하게 했다고 서러운 속내를 드러냅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이라고 가서는 자식 낳아 먹고 사느라 어깨너머로 조금 익혔던 글도 다 까먹어 버리고 까막눈이 되었다고 합니다. 체구가 아주 작은 마님인데 손은 갈퀴처럼 큽니다. 나이가 올해로 여든입니다. 정풍연 마님은 ‘잘 썼네이, 그려 그려 그렇게 쓰면 되네’ 공부 시간에 돌아다니시며 다른 사람의 공책을 들여다보며 격려(?)하시다가 그리곤 조금 있다가 ‘에휴! 되다’ 하시며 방바닥에 벌러덩 누우십니다. 하긴 낼모레가 아흔이시니 될 만도 하지요. 하루 종일 밭에서, 뻘땅에서 일하다가 오셨으니 힘이 들만도 하지요. 정풍연 마님은 선유도 교회 권사님이신데 목요일에 교회에 오시면 제자훈련 반에 앉아 계시다가 레베카가 오면 레베카 뒤를 따라 춤추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걸어가십니다. 성경책 가방 들고. 그리고 가다가 뒤돌아보고 합죽 웃으십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하하 웃습니다. 정풍연 마님 레베카가 공부하는 동안 쌈짓돈 많이 풀었습니다. 이병례 마님은 ‘배우고 잡어서 왔소’ 하십니다. 아랫녘 억양이 강한 마님입니다. 어릴 때 학교 가는 동무들이 부러워 동무들이 안 보일 때 까지 처마 밑에 서서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합니다. 저 지난 겨울에 할아버지 천국에 보내드리고 혼자 지내시는데 어찌나 열심히 사시는지 제가 가끔 그 집 앞을 지나다가 바닷가에서 혼자 굴 까고 있는 마님에게 ‘힘들지 않으세요?’ 하면 ‘힘 한개도 안 드요.’ 합니다. 아주 샘도 많고 다부진 마님입니다.
	한글학교에 오시는 마님들을 보면 바위에 붙어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먹고 사는 일에, 자식을 키워내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만 했던 척박한 시절을 살아온 강인한 인생들이. 남자 형제들에게 밀려, 남편의 엄한 한 마디가 무서워, 자식들의 뒷전에서 배우고 싶은 갈망을 누르고 칠십이 되고 팔십이 넘은 할머니 학생들이 어쩌다 바위에 삶의 터전을 잡은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진 환경에도 꽃을 피우는 망주봉의 진달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님들의 표현대로 어서어서 ‘눈을 떠’ 제가 쓴 이 글을 마님들이 읽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마님들의 인생에 기쁜 웃음꽃이 활짝 폈으면 좋겠습니다.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