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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속에서] 한글학교 졸업식
  글쓴이 : 류순화     날짜 : 2014-12-28 17:59     조회 : 6467    

선유도이야기(90)






      온통 하얀 눈입니다.
      12월 들어 초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사흘이 멀다 하고 내려 쌓이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햇빛에 녹기도 합니다.
      눈이 온 날 아침은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나뭇잎을 다 떨군 빈 가지들마다 눈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해가 돋을 무렵에 보는 눈꽃은 보석 같습니다.
      햇빛은 눈꽃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반짝이게 합니다.
      달밤에 보는 눈꽃은 땅 위에 내린 별 같습니다.
      달빛은 깊지만 눈꽃을 통과하지는 못합니다. 달빛도 눈꽃을 반짝이게 합니다.
      바람이 살짝 눈꽃을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바람이 지나는 자리에 눈꽃이 집니다. 소리도 없이.
      동백꽃이 지듯 그렇게
      강아지들은 발바닥이 빨개지도록 눈밭을 뛰어다니고, 아이들은 눈썰매 하나씩 끌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미끄럼을 즐기고 있습니다.
      교회로 오르는 비탈길도 눈썰매장이 되었습니다.
      아침나절 맑게 개었던 날씨가 오후가 되자 어두컴컴해 집니다.
      어둑신해 지는가 싶더니 바람소리가 거세어집니다.
      밖을 내다보니 눈안개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남편이 오전 내내 넉가래(木杴)로 터놓은 길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보얀 눈안개 속으로 망주봉도 사라졌습니다.
      오후 여객선도 결항입니다.
      한글학교 졸업식 날이 내일인데
      육지에서 발이 묶인 마님들이 많아서 졸업식은 미뤄야 할까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오늘은 한글학교가 졸업식을 하는 날입니다.
      빛나는 졸업장도 만들고, 마님들의 열심과 개성에 맞는 상장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님들이 손수 쓴 편지들은 액자에 예쁘게 담아서 졸업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졸 업 장

      내 삶을 눈물 나게 했던 학교
      이제 나 (&npsb: )는 눈을 떠
      글자를 읽게 된 기쁨을 함께 공부한
      이옥인, 이병례, 박복덕, 윤옥녀, 유순애, 김영자, 정풍연 님들과 나눕니다.

      졸업장에는 마님들 스스로 서툰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습니다.
      서명처럼.

      김영자 마님은
      한글학교 반장으로
      솔선하여 학생 마님들을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으므로 리더십 상을 드렸습니다.
      이병례 마님은
      책 읽는 기쁨을 누림으로 행복하였답니다.
      책을 열심히 읽었으므로 독서 상을 드렸습니다.
      이옥인 마님은
      작고 예쁜 글씨로 한 자 한 자
      숙제를 성실하게 하였으므로 쓰기 상을 드렸습니다.
      윤옥녀 마님은
      공부방을 활기차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으므로 희락 상을 드렸습니다.
      박복덕 마님은
      모르는 것을 끝까지 알려고 하는 탐구력을 기쁘게 여겨 노력 상을 드렸습니다.
      정풍연 마님은
      한글학교의 최연장자로
      공부방 마님들을 격려하고 공부할 의욕을 불러 일으켜 주었으므로 온유 상을 드렸습니다.
      정풍연 마님은 출석 일수가 모자라 ‘명예졸업장’을 드렸습니다.
      유순애 마님은
      공부하러 오는 일에 큰 용기를 냈으므로
      그 마음을 아름답게 여겨 격려 상을 드렸습니다.
      김월옥 마님은
      공부방 자원봉사자로 마음을 다해 학생 마님들을 섬겼으므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섬김 상을 드렸습니다.
      여름방학 동안에도 집에서 마님들의 보충수업을 꾸준히 해 주셨습니다.

      졸업식 순서 중에 한 분씩 졸업하는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이크를 잡으니 말씀들도 잘 하십니다.
      ‘글자’를 배워 ‘눈을 뜬’ 기쁨을 가슴 벅차게 이야기 하십니다.
      작년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마님은 그 마음의 허전함을 공부방에 오는 즐거움으로 채웠다고 합니다.
      TV 가요프로에서 자막으로 나오는 가사를 곡에 맞춰 부르는 즐거움도 생겼다고 ‘좋아라’ 합니다.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자식들의 이름도 쓸 줄 알게 되어서 기쁘다고 합니다.
      감사헌금 봉투에 마님들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레베카에게 전달해줍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여객선 출항이 불투명해서 졸업식 떡은 못 돌렸지만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졸업식이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학생 마님들이 허리를 숙여 선생님에게 인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레베카가 인사말을 했습니다.
      “여러 어르신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 많이 행복했습니다.”
      레베카의 목소리가 살짝 떨립니다.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듭니다.

      그리고 졸업생 마님들이 한 목소리로 졸업가를 불렀습니다.
      감정과 폼을 한껏 잡고서

      “야이~ 야이~ 야~
      내 나이가 어때서 공부에 나이가 있나요
      설움도 하나요 열정도 하나요
      공부만이 정말 내 소원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인데“

      그런데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공부할 때를 놓친 6070세대가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고 저녁에 모여, 일로 굳은살이 박힌 거친 손에 연필을 잡고 열심히 공부하던 마님들의 간절함이 전달되어 와서.
      글 모르던 한을 풀고, 자신의 이름과 자식들의 이름을 쓸 줄 알게 되고, 떠듬떠듬 글을 읽게 된 것이 기뻐서 마음으로 노래하던 “내 나이가 어때서”
      비록 몇 줄 되지 않지만 자식에게 혹은 손녀에게 삐뚤빼뚤 편지도 쓰게 된 것이 감격스러워서 목청껏 노래하던 “내 나이가 어때서”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에 일생에 다시 한 번 온 기회를 잡은 마님들이 대견해서 마음껏 박수를 쳤습니다.
      마님들이 원해서 공부하는 짬짬이 가요도 배웠던 모양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를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인데”로 개사해서 졸업가로 열창했습니다.

      저도 한 번 배워볼까 합니다. “ 내 나이가 어때서”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











  김홍윤
이 코멘트에 대하여...   15-01-09 22:00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대단한 결심과 열정에 놀랬습니다. 정말 기쁘네요. 재미있는 동화책들 많이 읽고 손자들에게 이야기해드리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성경읽는 모습도 그려봅니다. 참 좋네요. 축하합니다. 그리고 목사님 사모님 선생님들 정말 큰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엄청난 보상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정말 축하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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