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91)
	바람이 분다. 그 섬에 겨울이면 온통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리려는 듯 바람이 분다. 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글 속엔 언제나 바람이 분다. 동시에도, 수필에도, 일기에도, 그림에도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야속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 바람 속엔 슬픔이 섞여 있기도 하고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바람 때문에 덕규 할머니는 남편과 작은 아들을 바다에서 잃었고 동호 할머니도 하나뿐인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 경철이 어머니도 바다에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 넷을 데리고 섬을 떠났다. 섬은 홀로 된 지어미가 남은 아이들과 살 곳이 못 된다. 바람이 불어 여객선이 통제되는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그런 날 섬은 홀로 바다에 떠 있다. 육지로의 모든 길은 막히고 외롭다. 가끔은 겨우내 바다에서 자라야 할 김이 바람에 떠밀려 한 번도 김을 채취하지 못한 채 해우발(김 양식 발)을 걷어야 할 때도 있다. 올 해 정풍연 권사님네 해우발이 그렇다. 해우발을 일찌감치 강쳤는데도 권사님은 꿋꿋하시다. 바람을 마주하고 뻘땅에 나가 오늘도 굴을 따오신 모양이다. 저녁예배에 오시면서 굴 한 사발을 가지고 오셨다. 목사님 드시라고, 굴에서 바닷바람 냄새가 난다. 선유도에서 제일 맛난 검녘에서 자란 굴이란다.
	바람 속에 눈이 섞였다. 레베카의 마지막 영어 수업에 같이 갔다. 무릎 깊이까지 눈이 쌓였다. 쿠키를 구워서 한 손에 들고 넘어질까 봐 서로 의지하면서 걸어갔다. 눈이 바람에 날려 다리 위는 그나마 걸을 만하다. 내린 눈과 날린 눈이 쌓인 그늘진 곳은 눈이 무릎을 넘는다. 좁은 골짜기를 통과하느라 눈 섞인 바람이 맵다. 아마도 겨울바람 속에는 칼날이 숨었나보다. 운동장에서 무녀도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다. 6학년 건이가 눈덩이 하나를 뭉쳐 레베카에게 슬쩍 던진다. 레베카의 등에서 눈덩이가 하얗게 부서진다. 그리곤 짓궂게 웃는다. 건이는 지금 선생님에게 눈싸움을 걸고 있다. 눈밭을 50분 넘게 걸어온 레베카가 좀 추운가보다. 건이의 의도를 눈치 챘지만 눈을 탁탁 털고 그냥 교실로 들어간다. 온풍기를 켜고 수업 준비를 한다. 아이들과의 마지막 수업을 준비한다. 교실 공기가 훈훈해 지자 아직도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부른다. 찬바람이 잔뜩 묻은 아이들이 왁자지껄 교실로 들어온다. 아이들에게서 눈바람 냄새가 난다.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자 교실이 비좁다. 아이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가느다란 현민이는 얼굴이 파랗게 얼었다. 젖은 장갑은 벗어서 온풍기 바람이 잘 가는 곳에 널어두고 아이들이 레베카 주위에 둘러앉는다. 제일 산만한 서율이를 오른쪽에 앉히고, 왼쪽에는 온이를 앉힌다. 오늘 수업은 비교급과 최상급을 배우는 모양이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단어들을 말한다. 앞니가 뭉턱 빠진 2학년 서율이도 제법 잘 따라 한다. “예성아, among 단어를 넣어서 ‘셋 중에서 내가 제일 키가 크다’ 문장을 만들어 봐” “어몽???” “.....” “어몽? 어몽?” “어 뭥 소리???” 예성이의 능청 개그에 교실 안이 뒤집어진다. 아이들이 책상을 두들기며 웃어댄다. 교살 안은 금방 웃고 떠들고 아수라장이 된다. 레베카가 수업을 하는 동안 난 구워 가지고 간 쿠키를 바구니에 담고, 유치원 교실에 가서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받아 온다. 종강 파티를 할 생각이다. 원래는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무녀도에서 선유도까지 오는 길이 너무 춥다. 그래서 간단하게 쿠키와 차만 준비해서 학교로 가지고 왔다. 지금 아이들은 하고 있는 수업이 마지막 수업인 줄은 알까? 레베카는 약간 감상적인 것 같은데 아이들은 여전히 즐겁다. 떠들고 장난치고, 때리고, 던지고, 또 누구는 삐져서 엎드려 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과 쿠키와 차를 마시며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다고 레베카가 말한다. 아이들이 묻는다. “선생님 내년에는 우리 학교에 안 와요?” 레베카가 대답한다. “응,”
	성탄절이 다가오자 레베카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 한다. 며칠 생각 한 끝에 아이들의 사진을 모아 2015년 달력을 만들기로 했다. 여름 켐프 때 찍은 사진들과 수업 중에 찍은 사진들, 음악회 사진들로 아이들 달력을 만들었다. 사진을 고르고 배열하면서 레베카가 그 순간들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웃는다.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메시지도 남긴다. 빛깔 고운 색지에 손 글씨로 예쁘게 써서 달력 뒤 빈 칸에 붙인다. 달력을 만들면서 아이들이 기억해 주지 않아도, 아이들과 함께 했던 날들이 즐거웠기에 충분히 행복했다고 레베카가 말한다.
	며칠 전 남편과 레베카가 군산에서 섬에 들어오기 위해 여객선을 탔는데 선실 안에 먼저 타고 있던 윤옥녀 마님이 레베카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공손하게 손까지 모으고 폴더 인사를 하시더란다. 아직 우리는 그런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동네에서 한글학교 마님들을 만나면 레베카만 보이고 나는 안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온통 선생님에게만 관심을 보인다. 신치에서 아현이와 채원이를 만났는데 채원이가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두 손 높이 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온 몸으로 선생님을 반긴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가 보다. 눈물 없는 감격 상봉이다. 아현이는 내가 해 주는 요리는 맛있게 먹으면서도 언제나 선생님만 반긴다. 방학 전에, 선유도아이들과는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예쁘게 냅킨도 접고, 분위기 있는 촛불도 켜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우리 집에서. 아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중학생 오빠 충만이를 따라와 먹었던 우리 집 스테이크가 맛있었다고 노래를 불러서, 유치원생 용운이까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 먹는 양이 장난이 아니라고 레베카가 귀띔을 해 주어서 스테이크 넉넉히 구워 즐겁게 먹었다.
	레베카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선유도에서의 일상을 정리하고 있다. 지난 10개월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쉼표 하나 찍고 있다. 아이들의 마음에 커다란 발자국 하나 남기고 레베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섬 할머니들의 생애에 커다란 발자국 하나 남기고 레베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내 마음에. 올해 봄바람은 더 시리다. - 류순화(한국섬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