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이야기(92)
	레베카에게 지금 밴프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개와 늑대의 시간 조금 전 雪山 너머로 사라진 해는 맞은 편 雪山 위에 붉은 노을을 남기고 제 갈 길로 가고 사람이 사는 동네에 저녁이면 여우가 내려와 앉아 있다 간다는(우리보다 먼저 이 방에 머물렀던 분이 이야기해 주었지) 로키산맥의 산골 마을에 짐을 풀었다. 아니, 어쩜 여우의 동네에 사람이 들어와 사는 거겠지. 그 여우가 여기 있는 동안 우리에게도 얼굴을 보여줄는지. 밴프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는데... 산꼭대기뿐 아니라 산 아래에도 잔설이 쌓인 봄 초입의 로키는 또 그대로 웅장해.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람하게 잘 생긴 바위산과 산들(Rocky),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보석처럼 박힌 아름다운 호수들, 그 호수들 중 단연 최고인 Lake Louise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감사했지. 빅토리아 산 아래의 호수는 하얀 눈에 덮여 꽁꽁 얼어 있었어. 에메랄드빛의 호수는 볼 수 없었지만 눈에 덮인 호수가 주위의 쭉쭉 뻗은 침엽수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어. 하얀 눈과 진초록의 나무들. 처음 Lake Louise를 보았을 때는 8월 말이라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었는데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이 계절엔 하얀 얼음으로 덮여 있네. 그 호수 위에서 사람들은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네. 난 호숫가를 조금 걸었어. 많이 추워. 빅토리아 산을 훑고 내려오는 눈바람이 제법 차가워.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Moraine Lake로 오르는 길은 눈과 얼음으로 굳게 닫혀 있어서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지. 내 생애 Lake Louise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지, 감격할 뿐이지. Ywam D.T.S 숙소로 사용하는 리조트가 있는 canmore에서 훈련 장소로 사용하는 교회가 있는 밴프 다운 타운까지는 약 35km.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이 설산 위에 그리시는 변화무쌍한 그림을 감상하며 아름다운 길을 오고 갔지. 훈련생은 어른이 21명, 아이들이 14명. 스텝들과 강사진까지 합쳐 모두 51명. 아침이면 아이들을 포함한 51명이 여섯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훈련 장소로 갔다가 저녁이면 숙소로 돌아오는 강행군의 나날이었어. 아침 일찍(보통 07:10) 훈련 장소로 출발하는 데, 얼굴은 매만지고 나와도 아침밥은 미처 챙겨먹지 못한 여자 훈련생들은 한 손에는 토스트를 다른 손에 커피 컵을 들고 우물거리며 차에 오르고,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아기(만 두 돌 된 아기부터 9세까지)들을 안고 차에 오르는 열혈 엄마들을 보며 많은 도전이 되었어. 아이들에게 먹일 아침식사까지 챙겨서 엄마들의 짐은 더 많아. 어른 훈련생 대부분이 애기 엄마들이어서 아빠들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돈 벌어서 아내와 아이들 훈련비 보내고 있다네. 세상에는 특별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참 많아. 하나님을 향한 열심 있는 사람들이 참 많아. 생각만 하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아. 난 저 나이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하고 뒤돌아보게 되었지. 잠이 덜 깬 아이들을 안고, 걸리고 나오는 젊은 엄마들과 빵과 커피를 손에 들고 나오는 싱글 자매들, 각자의 짐과 전체의 짐을 양손 가득 들고 나오는 아빠들과 젊은 형제들. 거대한 통곡소리를 들으며 애굽을 빠져나오던 무리들도 저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발효되지 못한 밀가루 반죽을 어깨에 둘러메고, 잠이 덜 깬 아이들을 앞세우고 서둘러 고향 길에 오르던 이스라엘의 후손들. 믿음의 행군을 위해 최소한의 양식만을 들고 집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헌신을 위해 휴학을 하고, 휴직을 하고, 집을 팔고, 직장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성품 훈련을 하며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 레베카!! 드디어 in 서울 했군. 혼자 방 얻고, 이사하고, 짐 정리까지 하느라 고생했어요. 하필, 엄마가 없을 때 취직이 되어서 혼자 보고, 혼자 결정하고, 실질적으로 자주독립했네. 지금 현재는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로 사는 것 보다 ‘더 살고 싶은 게 없다’는 네 말에 한편으로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감사했고, 한편으론 굳이 어려운 길을 가는 네가 어미의 맘으로는 안쓰럽고. 어쨌든 복잡한 마음이야 사람은 의미지향적인 존재인데, 의미는 사명에서 나오지 그런데 그 사명은 자기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서 오는 거야 가족이나 이웃, 민족, 종족 등 너와 절대 타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명이 설정되는데 난 네가 지금 섬기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절대 타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명을 깨달았으면 좋겠어. 타자를 위한 삶을 살려면 철저한 사명의 사람이 되어야겠지. 사명(?)하면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데 난 모든 사람에게 사명이 있다고 생각해 어떤 이는 그것을 깨달아 사명을 따라 살고, 어떤 이는 그것을 알지 못해 그렇게 살지 못할 뿐이지. 네가 말한 것처럼 사람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로 복귀하는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섞여 보편적인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기를 바래. 그리고 균형도 잃지 말아야겠지. 상담자와 후원자로서의 균형감각도 잃지 말아야겠지. 너에게 메일을 쓰다가 창밖을 보니 사슴(뮬더) 한 쌍이 내려와 뭔가를 먹고 있네. 여기 동물들은 사람들을 안 무서워해.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치지 않고 빤히 쳐다보곤 해. 문을 열고 나가서 사슴들이 뭔가를 찾아 우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지. 걔네들은 나를 구경하더군. 내일 아침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아직 여우는 보지 못했음. 아마도 끝내 여우는 보지 못할 것 같아 그 대신 사슴과 다람쥐가 마당까지 내려와 노는 것을 매일 볼 수 있었어. 밴프를 떠나던 날 아침 雪山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았지 해가 보이기도 전에 붉은 구름이 하늘 가장자리에 피어오르더니 그 붉은 기운이 점점 넓어지면서 맞은 편 雪山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어. 황금빛으로 산 전체가 타오르는 것 같아 그 붉은 빛 가운데로 해가 솟아오르네. 광야에 떠올랐던 불기둥이 저랬을까? 레베카!!! 일 년 동안 수고 많았어요. 우리 모두에게 레베카가 복이 되었어요.